영국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해”-국립 중앙 박물관(모든 작품의 사진 및 설명, 해설자)

장소:국립 중앙 박물관 기획 전시 기간:23.06.02-23.10.09몇달 전에 예약하고 기다렸던 국립 중앙 박물관 기획 전시영국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해”을 오늘 봤어요.큰 사이즈의 원화를 보는 감동은 정말 대단했어요.꼭 한번 직접 가서 보세요.작품 목록 및 설명

모든 작품 아래 안내판이 있습니다만, 평일인데 사람이 많고 접근이 어려웠습니다.오늘 찍어 온 모든 작품과 작품의 설명을 여기에 옮기고 봅시다.관람 전후에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겠습니다.전시회에서 오디오 가이드의 대여는 3,000원으로 일부만 해설합니다.

한국과 영국의 국교 정상화(1883)140주년을 기념하고 영국 내셔널 갤러리 소장의 명화를 국내에서 처음 공개하는 전시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카라바죠, 부산, 벨라스케스, 반 다이크, 렘브란트, 고야, 터너, 콘스타 부루, 토마스·로렌스, 마네, 모네, 르느와르, 고갱, 반·고흐 등 서양 미술의 거장들의 명화 52점을 전시합니다.그동안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한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에서 인상주의 회화까지 15~20세기 초 유럽 회화의 흐름을 짚어이번 전시에서는 서양 미술 명작을 통해서 미술 주제가 신이 사람과 우리의 일상을 향한 모습에 초점을 맞춥니다.-국립 중앙 박물관

전시를 열고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옛 그리스 로마인처럼 다시 인간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종교와 신은 여전히 유럽 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신의 세계를 그렸던 그림에 사람이 관찰한 세계가 포함됩니다.16세기 교회가 분열하고 한편에서는 가톨릭 신앙을 띄우려는 의도로 감동적인 미술을 발전시키고 한편으로는 종교 미술이 우상 숭배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고 화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사람과 그 주변의 일상으로 옮아갑니다.시간이 지나고 사회가 변화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확대하고 개인 그리고 저에 대한 관심에 연결됩니다.그림은 “무엇을 그릴까 얼마나 비스름히 그려?”의 문제에서 벗어났습니다.이번 전시에서는 영국의 국립 미술관이 수집한 유럽 회화를 국내에서 처음 소개합니다.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보티첼리부터 팬·고흐까지 50명의 거장이 그린 명화 가이의 전시실에서 여러분을 기다립니다.15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중세 이후 500여년 세월이 그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사람”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담아 그림에 담긴 화가의 시선을 쫓고 보면 어떨까요?멋진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고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말이 들릴지도 모릅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사람들은 옛날 그리스, 로마인처럼 다시 인간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와 신은 여전히 유럽 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신의 세계를 그리던 그림에 사람이 관찰한 세계가 담기기 시작합니다. 16세기 교회가 분열되면서 한편으로는 가톨릭 신앙을 북돋우고자 감동적인 미술을 발전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미술이 우상숭배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며 화가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사람과 그 주변의 일상으로 옮겨갑니다.시간이 지나면서 사회가 변화하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확대되며 개인 그리고 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집니다. 그림은 ‘무엇을 그릴 것인가, 얼마나 비슷하게 그릴 것인가’ 문제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영국 내셔널 갤러리가 수집해 온 유럽 회화를 국내 최초로 소개합니다. 르네상스부터 인상주의까지, 보티첼리부터 반 고흐까지 50명의 거장이 그린 명화가 전시실에서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15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중세 이후 500여 년의 세월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사람’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두고 그림에 담긴 화가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은 어떨까요? 멋진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릴지도 모릅니다.

1. 르네상스, 사람 곁에 오신 하나님

“르네상스(Renaissance)”는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죠.14세기경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변화의 움직임은 중세 동안 잊혀졌던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14세기 말에 유행하면서 16세기 초 정점에 달했습니다.화가들은 공간을 실감나게 표현하면 수학을, 사람의 몸을 정확히 묘사하려고 해부학을, 영감을 얻으려고 고전을 탐구했습니다.기독교적 관념에 따르고 추상적으로 신의 세계를 다룬 방식에서 벗어나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관찰하고 화면에 거두었습니다

안토넬로 다메시나

안토넬로 다메시나, 서재의 성 히에로님스, 1475

4세기의 학자이자 수도사였다 성 히에로니무스(성 이에로니모)이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그러나 그림 속의 성인의 서재는 이 그림이 그려진 15세기 당시의 서재의 모습을 보이고 줍니다.바닥 타일과 반복되는 아치 등에서 원근 법으로 여겨집니다.계단 위의 공작, 아주 새 그릇에 담긴 물은 영원히 진실과 순수를 상징합니다.오른쪽에 있는 사자는 성 히에로니무스가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뺀 후, 사자가 성인에 따랐다는 전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그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 타 성경”은 지금도 가톨릭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앙토넷로은 네덜란드의 화가의 영향을 받고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유화에 능통하고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산드로·보치치에리

산드로 보티첼리, 세인트 제노비오의 3가지 기적, 1500년경

 

5세기에 살았던 피렌체 주교 성 지에노비오의 삶을 그린 연작 4점 중 2번째입니다.성 지에노비오은 나중에 피렌체의 수호 성인으로 이 그림에는 보티첼리가 살던 15세기 당시 피렌체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자를 대고 걸린 것 같은 선 원근 법이 그림에 시원스러운 느낌을 줍니다.보티첼리는 장식적이고 우아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에서 인기를 얻었습니다.그러나 만년에는 도미니크회 소속의 수전사·지로ー라모, 사보나 롤라(1452-1498)을 추종하고 이 작품처럼 경건하고 담백한 종교화 주로 그리게 됩니다.성 제노비오의 세가지 기적

https://thumbnews.nateimg.co.kr/view610///news.nateimg.co.kr/orgImg/pt/2023/06/24/202306241656770701_6496b18fb342b.jpg

보티치에쯔리의 “성 지에노비오의 세가지 기적”에는 성 지에노비오이 일으킨 세가지 기적을 그린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왼쪽에는 어머니를 때리고 저주 받은 두 아들을 치료하는 장면이 중간에 죽은 소년을 구하기가 오른쪽에는 시각 장애자의 눈을 치료하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습니다.그림 속의 몇가지 직선이 하나의 점에 모여서 작품의 공간감을 보다 명확하게 느껴지는 선 원근 법이 사용되었습니다.죠반니·베리니

조반니 벨리니, 성모자, 1480-90년경

중세 그림의 금빛 배경 대신 하늘과 산이 보이는 풍경 앞에 성모와 아기 예수가 부드럽게 앉아 있습니다.소박한 복장과 부드러운 몸짓은 두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고 줍니다.성모가 손에 쥔 석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상징합니다.대리석 난간 앞에는 화가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벨리니가 그린 작은 성모상은 개인의 종교 활동을 위한 그림으로 인기가 있었습니다.그는 베네치아에서 손꼽히는 화가 가문 출신으로, 티치아노를 비롯한 차세대 베네치아 화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돈보다 귀중한 청색, 울트라 마린울트라 마린은 아주 진한 청색 안료로, 아프가니스탄산의 귀중한 라주 라이트(라피스 라즈ー리)로 만들어졌습니다.라주 라이트 100그램 속에 불과 4그램밖에 들어 있지 않을 만큼 귀중한 안료입니다.울트라 마린은 성모의 옷을 그릴 때 자주 사용되었습니다.돈보다 비싼 울트라 마린을 사용한 것은 그림을 후원한 사람의 돈이 많고 작품 속 인물을 매우 존경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이 시대, 울트라 마린과 같은 값 비싼 안료는 베네치아를 통해서 수입되었습니다.그래서 죠우아은니·베리 나 혹은 티치아노의 같은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다른 지역 화가들보다 쉽게 높은 안료를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라파엘로, 성모자와 세례 요한, 1510-11년경로마 교회를 생각하는 풍경을 배경으로 갈대로 만든 십자가를 가진 세례 요한이 아기 예수에 훗날 겪게 될 수난과 부활, 신성한 사랑을 상징하는 카네이션을 건네줍니다.섬세하게 표현한 성스러운 인물 사이의 교감이 돋보입니다.배경의 건축물과 성모의 모습으로 강조된 두 아이의 손이 화면 중앙에 있어 안정된 삼각형 구도 속의 인물이 배경과 조화합니다.이 작품은 전성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인 라파엘 러가 바티칸교 황궁에 자신의 걸작인 아테네 학당을 그리던 시기에 그려졌습니다.가바 남작 조지·캬닝그의 소유였다는 것부터 “가바의 성모”이라고도 불립니다.광대 델 폴라이우오로광대 델 폴라이우오로, 아폴로와 다프네, 1470-80년경피렌체의 도시 전경과 아르노 강을 배경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널리 읽힌 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43BCE-17/18)의<변신 이야기>에 담긴 신화를 그린 그림입니다.아폴로가 활과 화살로 놀큐피드를 놀리자 이에 화를 낸 큐피드는 아폴로에 황금의 화살을 쏘았고 다프네를 사랑하고 다프네에는 납의 화살을 쏘았고 그를 거부합니다.아폴로가 다프네를 뒤쫓아 손이 닿는 순간, 다프네는 아버지인 강의 신 페네우스의 도움으로 아폴로를 피하고 월계수로 바뀝니다.신화 속 인물의 사랑과 두려움, 좌절이 그림에 담고 있습니다.200년 후의 아폴로와 다프네피렌체의 도시 전경과 아르노강을 배경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널리 읽혔던 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43BCE-17/18)의 <변신 이야기>에 담긴 신화를 그린 그림입니다.아폴로가 활과 화살을 가지고 노는 큐피드를 놀리자 이에 기분이 상한 큐피드는 아폴로에게 황금 화살을 쏘아 다프네를 사랑하게 하고 다프네에게는 납 화살을 쏘아 그를 거부하게 합니다. 아폴로가 다프네를 쫓아 손이 닿는 순간 다프네는 아버지인 강의 신 페네우스의 도움으로 아폴로를 피해 월계수로 바뀝니다. 신화 속 인물들의 사랑과 공포, 좌절이 그림에 담겨 있습니다. 200년 후 아폴로와 다프네바로크 시대의 대표 조각자로 건축가 벨니ー니은 돌을 깎고 아폴로와 다프네 조각 상을 만들었습니다.보라매 이우오ー로과 베루니니 모두 다프네가 월계수 나무로 변신하는 순간을 작품에 담고 있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베루니니의 조각 상은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작품에서 보라매 우이 워로 그림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입니다.바로크 시대의 작품은 장면을 화려하게 표현하고 사람의 움직임과 감정을 강조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베루니니의 조각 상은 포라우이우오ー로의 그림보다 표정이 강조되고 있으며 동작도 더 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죠우아은니·아토 안토니오·보르 호랑이 엠피오의 추종자지오반니 안토니오 볼트라피오 추종자 나르키소스 1500년경젊고 아름다운 날키소스(또는 나루시스)이 물 그릇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봅니다.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메아리라고 날키소스에 대한 그리스 신화가 있어요.나르키소스를 요정 에코의 사랑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요.그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사랑에 빠져서 헛된 사랑에 시달리다 결국 죽어 버립니다.날키소스 신화는 오늘의 허영을 경계하는 이야기로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다미아노 마차다미아노 마차, 겁먹은 가니메데, 1575년경거대한 독수리가 알몸의 소년을 잡고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그리스·로마 신화에 의하면, 목동의 가니메데는 아름다운 외모가 두드러지면서 독수리로 변신한 주피터에 납치되어 올림푸스 산에서 신들의 식사 시중을 하게 되었습니다.이 그림은 원래 변호사 프란체스코·아소니카의 저택 속의 테라스의 천장을 장식으로 그린 것입니다.아소니카는 티치아노의 법률 대리인, 마차는 티치아노의 제자였던 것으로 티치아ー노이 마차를 아소니카에 추천했는지도 모릅니다.원래 그림은 팔각형이었지만, 18세기 초, 벽에 걸리도록 캔버스를 함께 직사각형으로 했습니다. 이거 조코레초, 머큐리, 큐피드와 함께 있는 비너스(사랑의 가르침), 1525년경전령의 신 머큐리가 다정한 아들의 큐피드에 읽는 사랑의 신 비너스는 그 앞에서 우리를 바라보겠습니다.신들의 이야기를 빌려서 그린 누드에서 이상적인 비례와 리얼한 명암 법이 돋보입니다.비너스는 원래 큐피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우리와 눈이 맞게 자세가 수정되는데 이렇게 캔버스에서 바로 그림을 고칠 방법은 유화 기법에 능한 베네치아 화가들의 특징입니다.한쌍에 제작된 그림전령의 신 머큐리가 다정하게 아들 큐피드에게 읽어주고, 사랑의 신 비너스는 그 앞에서 우리를 바라봅니다. 신들의 이야기를 빌려 그린 누드에서 이상적인 비례와 리얼한 명암법이 돋보입니다. 비너스는 원래 큐피드를 바라보다가 지금처럼 우리와 눈이 마주치도록 자세가 수정됐는데, 이렇게 캔버스로 바로 그림을 고치는 방법은 유화 기법이 뛰어난 베네치아 화가들의 특징입니다. 한 쌍으로 제작된 그림왼쪽 그림은 잠에 떨어진 비너스라 큐피드를 훔쳐보는 사티 로스를 그렸습니다.이 그림은 원래 우리 앞에 전시된<머큐리, 큐피드와 함께 있는 비너스>와 짝으로 그렸습니다.2개의 그림은 처음부터 똑같은 장소에 놓고 두려고 만든 작품입니다.만토바 지역에 있는 마나 페이 백작의 집의 1층의 침실에 끼어 있었다고 합니다.도메니코 키울께요도메니코 키울께요 공방,소녀,1490년경목판에 템페라의 물감으로 그린 작은 사이즈의 작품입니다.정교하고 정확한 선, 밝고 균등한 빛의 묘사는 템페라 기법의 특징입니다.15세기 중반 이전의 이탈리아의 초상화가 대부분 고대 로마의 동전처럼 옆모습으로 얼굴의 절반만 노출된 것보다 그림 속의 소녀는 비스듬히 앉아 있고, 우리와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기랑다요은 보티첼리와 동 시대에 활동한 피렌체의 화가로, 미켈란젤로(1475-1564)는 젊은 시절 그의 공방에서 조수를 맡고 있었습니다.이 초상화는 그의 공방에 있던 화가의 1사람이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티치아노티치아노, 여자(달마티아의 여자), 1510-12년경티치아ー노이 20대 초반에 그린 초상화에요.머리에 두른 베일을 비롯한 투명한 천의 표현에서, 화가로서 티치아노의 솜씨와 기술이 젊어서 이미 완숙기에 이르고 있어요.죠우아은니·베리니의 제자인 티치아노는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유럽 각국의 강력한 통치자가 그에게 그림을 주문했습니다.이 작품의 별칭”라스키아보나”은 “달마 티아의 여자”라는 의미에서 달마 티아는 1420년부터 1797년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의 식민지였던 아드리아 해의 동쪽, 지금의 크로아티아 해안 지역의 일입니다.그림과 조각 중 누가 더 뛰어나고 있는가티치아노의 작품”여성”의 난간의 오른쪽은 한 사람의 옆모습이 조각되어 있습니다.그림 속에 조각을 묘사한 것은 그 당시 있었다”그림과 조각 중 어느 쪽이 더 뛰어난 미술인가”에 대한 논쟁을 생각 나게 합니다.고대 로마 조각의 영향을 받은 난간의 오른쪽 옆 얼굴은, 티치아노가 조각을 비슷하게 그릴 수 있고 또 그의 그림이 조각을 건너뛸 수 있음을 자랑한 것으로 보입니다.난간에는 화가의 이름인 티치아노·우에치에리오(Tiziano Vecellio)의 약자”T.V.”이 새겨지고 있습니다.죠우아은니·바티스타·모로니요반니 바티스타 몰로니, 여성, 1556-60년경1534년 베르가모 귀족의 딸로 태어난 루치아·알바니ー·아보가드로 백작 부인은 시에 재능이 있고 그녀가 쓴 소네트를 모아 엮은 책이 남아 있습니다.16세기 이탈리아 북부를 대표하는 초상 화가인 모로 헤니는 반짝이는 호화 복식, 비싼 갑옷 등으로 귀족의 우아함을 표현한 전신 초상화로 유명했어요.새틴 드레스의 화려한 다홍 색과 치마의 체크 무늬 드레스의 꼬임 장식과 세로 차이는 당시 유행한 스타일로, 몰로니는 유화 기법을 활용하고 질감을 잘 표현했습니다.부채의 손잡이를 손으로 가린 것은 손잡이가 귀중한 재료로 만들어지고 사치 금지 법의 규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야코뽀·칭토렛토야코포 틴트렛, 빈센조 모로시니, 1575-80년경빈첸초·모로시ー니(1511-1588)은 157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즉위식에 베네치아 대표로 참석했는데 이 때 황금 스톨 기사단의 기사로 임명되었습니다.어깨에 멘 금실로 자수된 스톨이 이 기사단의 상징입니다.틴토레토는 모로시ー니의 날카로운 민감한 성격을 위엄을 갖추고 표현했습니다.노인의 얇은 피부, 깡마른 코, 주름이 생긴 얼굴 속의 옅은 청색의 눈이 우리를 간파하게 바라봅니다.얼굴은 물감을 정중히 도리중넨 반면, 옷은 빠른 필치로 채웠어요.틴토레토는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피렌체의 전통에 따른 미켈란젤로의 선과 구성, 그리고 베네치아의 전통에 따른 티치아노의 색채를 융합시키고 그리고자 했습니다.퀸)·마시 아스퀸텐 마시스, 보좌에 앉은 성모자와 사천사, 1506-09년경성모의 금색의 보좌로 왕관, 천사들이 연주하는 류트와 하프, 바닥의 카펫 등을 정교하게 그렸습니다.아기 예수의 붉은 산호 목걸이는 그가 흘리는 피를 상징합니다.성 모자의 머리 뒤에서 금빛 줄기가 뻗어 그들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방식은 15세기 네덜란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사치품이었던 터키산 카페트에 발을 얹도록 한 것도 성모를 예우한다는 의미입니다.리얼한 초상화와 화려한 종교화로 잘 알려 진 퀸)·마시 아스는 16세기 초 북유럽 안또 우에루후에은의 대표적인 화가입니다.양·호살토양호사르트, 작은 공주, 1530-32년경이 소녀는 망명 중이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1481-1559)의 딸 도로테아(1520-1580)으로 추정됩니다.진주로 엮은 호화로운 옷을 입었고 소매에 있는 엷은 청색의 원형 무늬는 원래 왕족의 상징인 보라 색이었습니다.그녀의 가족은 1523년 크리스천 2세가 폐위되 쫓겨난 뒤 네덜란드에서 펠리페 3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마가렛(1480-1530)의 보호를 받았습니다.사실적인 초상이 유명한 양·호살토은 16세기 초 유럽 화가로서 처음 로마를 방문한 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회화의 요소를 북유럽에 들여왔습니다.손 안에 있는 작은 세계그림 속의 소녀인 도로테아는 왼손으로 혼천의를 거꾸로 들고 오른손의 손가락에서 혼천의 외륜을 가리키고 있습니다.도로테아가 가리키는 것은 덴마크에서 도로테아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2세가 다스리던 곳입니다.도로테아가 혼천의를 거꾸로 들고 있다는 것은 도로테아가의 사정이 나쁜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혼천의 가운데에 있는 두꺼운 고리에는 글자가 새겨지고 있습니다.아마 양·허 솔트의 이름의 문자를 섞어 만든 새로운 단어죠.당시는 작품 속에 다양한 의미를 숨기는 것이 많았습니다.분열된 교회, 다른 길1517년 독일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난 뒤 유럽의 교회는 중세 기독교의 전통을 지키는 가톨릭과 변화를 바라는 개신교로 나뉩니다.여전히 신의 섭리가 중요한 시절 교회의 입장이 나뉘어 화가의 시선도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17세기가 되자 분열된 교회의 다른 입장이 미술에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교회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바로크 미술에서 사람들의 신앙심을 높이려 했습니다.바로크 미술은 절대주의의 왕과 귀족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도 활용되었습니다.반면 개신교 중심의 북유럽에서는 그림 속의 이미지가 신처럼 숭배되는 것을 걱정하고 종교 미술을 거부하고 화가들은 자연스럽게 사람과 그 주변의 얘기에 집중하게 됩니다.미켈란젤로 멜리시 다 카라바조미켈란젤로 멜리시 다 카라바조, 도마뱀에게 물린 소녀, 1594-95년경한 소년이 우중 손가락을 도마뱀에게 물린 통증에 깜짝 놀라서 웅크리고 있습니다.이것은 짧은 감각적 쾌락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뜻밖의 고통을 비유한 것으로 소년의 귀에 꽂힌 장미와 꽃병의 꽃도 금방 시들어 사라지는 덧없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카라바조은 “정물을 그리는 것은 인물을 그리는 것만큼 예술적 재능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어요.자연을 직접 관찰하고 그리는 일을 중요시한 점은 그의 혁신적인 특징1개입니다.초기는 이 그림처럼 정물화 및 일상 생활 장면을 그리고 있었지만, 곧 감정적이고 극적인 종교화를 전문적으로 그리게 됩니다.카라바조에서 온 미켈란젤로, 천재에서 문제아카라 바조의 원래 이름은 미켈란젤로·메릿시입니다.이탈리아의 고향 마을 이름인 카라 바조 따서 카라 바조로 불리고 있었습니다.카라바조는 그림 실력은 뛰어났지만 성격이 나쁜 세어서 여기저기에서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결국 카라바죠은 칼의 싸움 끝에 사람을 죽이고 원래 살던 로마를 떠나고 여러가지 장소에 도망치다 인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그를 후원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죄를 용서 받은 로마에 가려고 했으나 다시 문제를 일으킬 감옥에 갇힙니다.카라바조은 결국 로마에 돌아가지 못하고 병들어 죽겠습니다.렘브란트·팬·레인렘브란트 반 레인, 63세 자화상, 1669렘브란트는 개신교 국가였던 네덜란드에서 활동했습니다.직접 이탈리아에 간 것은 없지만, 판화나 다른 동료로부터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1640년 암스테르담 최고의 인기 화가였지만, 이 자화상을 그릴 때는 이미 파산하고 있었습니다.렘브란트가 죽기 몇달 전에 그린 자화상입니다.늙어 얼굴에 집중하고 물감을 두껍게 바르고 얼룩이 있는 피부, 한마리 산모량이 적어진 눈썹 등을 그렸습니다.옷과 배경은 얇게 빨리 바르고 밝은 빛을 받은 섬세한 표정에 주목시킵니다.자화상에서 자신을 성찰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노인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회화 기술을 연습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디에고, 벨라스케스디에고 벨라스케스, 페르난도 데 발데스 대주교, 1640-45스페인의 벨라스케스는 1623년 펠리페 4세의 마음에 드에서 궁정 화가가 되었습니다.그와 친분을 쌓은 플랑드르의 루벤스(1577-1640)처럼 궁중인으로서도 높은 관리가 되어 그가 그린 초상화는 왕과 귀족의 권위 강화에 활용되었습니다.회화의 주인공 페르난도·데·발데스, 아니 노스는 1633년 그라나다의 대주교를 카스티야들 의회 의장을 지낸 인물입니다.이 작품은 원래 전신 초상화로 그려진 작품부터 일부가 절단된 것인데, 벨라스케스의 서명이 있는 종이를 가진 성직자의 손 그림(마드리드 왕궁 소장)을 이 초상화의 나머지 부분으로 추정합니다.조반니 바티스타 살비사소페라토(조반니 바티스타 살비), 기도의 성모, 1640-50화가의 별명”사소페라ー토”는 화가의 고향의 이름입니다.그는 개인의 기도를 직접 들어 줄 “혼자 빈 성모”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유명합니다.이 도상은 가톨릭 개혁의 원칙을 결정한 토리엥토 공권 의회(1545-1563)이후 유행했습니다.이 그림은 사실적인면서 단순한 구도와 색채로 감동을 줍니다.비싼 울트라 마린을 사용한 청색과 적색, 흰색 물감만 그려진 성모는 강한 빛을 받으며 존재감을 표합니다.조각 같은 얼굴과 우아한 색채는 르네상스 시대의 라파엘로 화풍과 비슷하지만 극적인 강렬한 빛은 바로크 회화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귀도 레니구이도·레니, 성마리아·마구다 레나, 1634-35년경성마리아·마구다 레나는 신약 성경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예수의 제자 한명입니다.서유럽 회화에서는 거의 쾌락을 거부하는 참회하며 그리스도를 섬길 것을 결의한 여자로서 그려지고 있습니다.참회하는 마리아·마구다 레나는 17세기에 잘 묘사된 주제이지만 이것은 가톨릭 개혁 시기에 교회에서 참회를 강조했기 때문입니다.당시 가톨릭 교회는 누구도 아는 간단한 주제로 감동적인 종교화를 그리고 개신교 교회에 가려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습니다.성스러운 그림을 그린 세속적인 이유구이도·레니와 그의 제자들은 성마리아·마구다 레나를 주제로 한 그림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도박에 열중하며 빚이 점점 늘어났다 그이도, 레니는 빚을 갚느라 재빠르게 간단하게 그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자신의 그림 속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주제로 작은 사이즈의 그림을 몇개 그리고 판 것입니다.<성 마리아·마구다 레나> 같은 성스러운 그림을 그린 이유가 도박 빚을 갚으려고라니 정말 놀랐습니다.니코·부산니콜라 푸생, 바커스 양육, 1628년경부산은 17세기 프랑스의 고전 주의를 이끈 화가로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일생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냈다.부산은 고대의 문화를 바탕으로 현실보다 더 완벽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술의 신인 주피터의 아들인 바카 스가 고모 이노의 시중을 받았다는 소식이 있습니다.그림 속에서 박카스는 이노의 남편 아타마 수에 의존하고 은그릇에 짜놓은 포도 즙을 마십니다.포옹하고 있다2사람의 아기는 이노의 아들들입니다.주피터의 아내 주노는 이노가 박카스를 자랑하는 것을 질투하는 이노와 머리 소스를 망치고 머리 수는 자기 아들의 한 사람을 죽입니다.요아힘·베케라ー루북유럽 아트 벨 펜 출신의 화가 베케라ー루은 일상적인 장면에 종교적 주제를 담은 그림으로 유명합니다.이 방에는 4원소인 불, 물, 공기, 흙을 주제로 한 4점 연작 중”불”과 “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각 그림에는 주제가 된 원소에 관련된 생산물이 그려지고 있습니다.요아힘 베켈랄, 4위안소: 화, 1570<불>에서 그림 속 여인들은 불에 구운 고기를 손질하고 있습니다.그림의 먼 배경에는 자매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찾아온 예수가 보입니다.마르타는 예수에게 동생 마리아가 자신의 음식 준비를 돕도록 말하고 달라고 하는데요.요아힘 베켈랄, 4위안소:수, 1569<물>에 그려진 16세기 양토 벨 펜의 시장에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가 나란히 있습니다.그림 속의 음식은 각각 가장 맛있는 각도로 배치된 것입니다.그림의 풍부한 음식은 실제의 관찰을 통해서 세심하고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베케라ー루는 빠르고 쉽지만 효과적인 필치로 그림을 그리면서 화가로서 열등한 역량을 잘 보이고 줍니다.먼 배경에 어부가 그물을 끌어올리는 모습은 부활한 예수가 사도들의 앞에 나타날 많은 물고기를 잡게 만들어 줬다는 풍어의 기적을 그린 것입니다.<물>작품 옆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사원 소설”와 요아힘·베케라ー루의 4원소의 나머지 작품<공기>,<흙>을 상세히 설명과 함께 보이고 줍니다.알브레히트 알토도르퍼알브레히트 알토도르프, 인도 다리가 있는 풍경, 1518-20년경독일의 화가 알토 달러 파가 사람 없이 풍경만 그린 작품입니다.다른 테마의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풍경 그 자체를 독립된 테마로서 인식한 16세기 초의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반영하고 있습니다.숲속 바위에서 강을 가로지르고 요새의 성문이 보이는 곳까지 높은 다리가 뻗어 있습니다.다리 끝이 건물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며 문부터 들어가려면 성에서 다리를 인출해야 합니다.알토 달러 모피는 자연스럽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잘 묘사하려는 종교화 역시 자연 속의 풍경을 담고 자신의 관심사를 드러냈습니다.메잉달토·호베마메인덜트 호베마, 작은집이 있는 숲 풍경, 1665년경바퀴 자국이 있어 길 위에서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가 햇빛을 받으며 이야기를 나눕니다.멀리 개와 산책하는 한 남자와 들판을 걷는 남녀가 보이는 한 여성이 오른쪽의 시골 집 문 앞에 서서 밖을 바라봅니다.호베마의 고향 암스테르담 인근 할렘 부근 숲을 배경으로 그린 작품입니다.실제 풍경을 보고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그의 단골 소재를 모으고 이상적인 전원의 모습을 그린 상상의 풍경화에요.알베르트·코프알버트 코프, 들판에서 말을 탄 남자와 목자, 두 소년, 소 일곱 마리, 1655-60년경개신교 국가였던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일상의 풍경과 사람들이 중요한 테마가 되었습니다.그림 속 인물의 배후에서 시작된 우리의 시선은 소몰이의 눈에 따라서 경치를 바라보게 됩니다.같은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프랑스 화가 클로드·로란의 고전적인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황금빛 햇살이 네덜란드의 시골의 일상의 한 장면을 비춥니다.금빛 햇살은 코프 작품의 특징으로,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이탈리아의 풍경화 양식을 반영한 이 타입의 풍경화가 널리 유행했습니다.우이람·팬·더·후에루다ー빌럼 반더펠더, 강풍 속 네덜란드 선박과 작은 선박, 1658우이람·팬·다·후에루다ー은 17세기 후반에 네덜란드에서 바다의 풍경화에서 인기가 있었습니다.배를 정확하게 그린 그의 그림은 당시 배의 모습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입니다.흰 돛을 날려군함의 큰 돛대에는 네덜란드 국기가 걸리고 고물에는 홀란트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전방의 배에 달린 깃발에 화가의 서명이 있습니다.바람·팬·더·후에루다ー은 정교한 배를 그린 흑백 드로잉으로 유명한 아버지 바람·팬·더·후에루다ー(1610/1-1693)에서 그림을 배웠습니다.팬·다·후에루다ー가는 16672년 프랑스의 침략으로 암스테르담에 경제 위기가 닥치자 영국으로 이주해 18세기 영국에서 바다의 풍경화가 발달하는 것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양·얼룩양수인, 여관(깨진 달걀), 1665-70년경양·얼룩은 고향의 네덜란드에 레이 아웃에서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그의 작품은 회식 분위기에 풍자를 담고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준 것으로 인기가 있었습니다.취해서 여관 주인의 스커트를 잡고 있는 남성은 양·스타인 자신이에요.그림 속에는 성적인 암시가 되풀이됩니다.빨간 모자를 쓴 남자는 담배를 잘게 썰어 넣으면 파이프에 손가락을 파고들고 그 옆의 남자는 여관 주인에게 자연스러운 눈길을 보냅니다.바닥에는 정력제로 유명한 홍합의 껍질과 잃어버린 순결을 상징하는 깨진 알이 흩어졌으며 열린 와인의 통과 봉, 프라이팬의 손잡이도 의미심장합니다.배경에서 한 소년이 몰래 그릇에 손가락을 넣고 있습니다.양·얼룩은 아이가 어른의 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말을 잘 그림의 주제로 활용하였습니다.그의 그림은 신앙 깊은 중산층 가정의 벽에 걸리고 교훈을 빌미로 즐거움을 줬을 것입니다.피터, 더·홋호피터 더 호프, 안뜰 음악회, 1677피터, 더·홋호는 중산층 여성과 아이들의 가정 생활을 그린 그림으로 잘 알고 있지만, 후기에는 이 그림처럼 암스테르담의 상류층의 모습을 많이 그렸습니다.안뜰에 있는 테이블을 덮은 터키산 카펫과 테이블 위의 이국적인 과일 오렌지는 그림 속의 인물의 재력을 보이고 줍니다.세련된 복장의 여성이 갖고 있는 잔과 은으로 된 젓갈이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다른 여자는 바이올린을 치는데, 이 시기의 미술은 음악 연주는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아치 아래에 선 남자는 건너 편 운하의 샛길을 바라봅니다.그늘의 안뜰의 풍경 대신 밝은 밖의 배경에 시선이 모입니다.제3부. 개인의 삶, 기념하고 추억 아래 제3부.새로운 시대, 저에 대한 관심17세기 후반, 계몽 주의가 팽배하고 사람의 이성의 가진 힘을 중시하였습니다.개인의 자유롭게 주목한 계몽주의는 지금까지 절대적이었던 교회와 국가의 권위를 협박했습니다.18세기 들어 절대 왕정이 쇠퇴하고 교회의 힘은 점점 약해졌습니다.신과 왕의 권위를 두려워하던 사람들은 점차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이런 변화에 박차를 가했습니다.새로운 시대를 맞아 종교나 사상의 매체를 넘어 개인의 경험을 기념하고 생각하고 그림이 활발하게 그려졌습니다.이처럼 화가의 시선은 개인의 삶을 위할 수 있었습니다.카날레토카날레토는 베네치아의 모습을 자세히 제대로 그린 풍경화로 유명했어요.그랜드 투어가 유행한 시기에 이탈리아에 온 영국인은 오늘 여행 선물로 그림 엽서를 사도록 그의 풍경화를 구입했어요.그림 속의 장소는 지금도 인기의 관광지입니다.카나렛(조반니 안토니오 카나르), 베네치아 카나레조 입구, 1734-42년경이 작품은 베네치아의 가나 렛죠 운하 입구를 그린 것에서 인기가 있고 카날레토와 그의 공방에서 반복 제작되었습니다.차가운 저녁 빛과 연한 핑크의 구름이 있는 하늘은 1740년대 전반에 그려진 카날레토의 그림에 많이 나타나는 특징입니다.카날레토(죠우아은니·안토니오·커낼)베네치아·카스텔로의 산·베드로, 1730년대베네치아 동부 카스테로 지역의 작은 섬 성 베드로는 당시 상인과 근로자들이 살던 조용한 지역이었습니다.그림 한가운데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은 1807년까지 베네치아의 대성당이었습니다.고전적인 르네상스 건축가 안드레아·파라디오(1508-1580)설계의 기초로, 16세기 후반에 수리된 이 건물은 18세기에 그랜드 투어를 진행할 영국인에게 인기가 있으며 이들은 영국에서 자신들의 시골 저택을 파라디오 양식으로 수리했어요.파라디오 양식의 우아한 파사드가 있는 성당을 그린 이 그림은 전경에 베네치아의 일반인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여행의 기념품로서도 아주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클로드·조· 벨 하세요클로드 조셉 베르네, 어부가 있는 강, 1751벨네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풍경 화가로 18세기 전반에 로마에서 활동했었습니다.그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17세기 프랑스 화가 클로드·로란과 부산의 전통을 계승하는 이탈리아의 풍경으로 유명했습니다만, 당시 그랜드 투어 중이던 관광객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로마의 판테온을 연상시키는 대안의 고전적 건물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나타나지만, 여러 요소를 조합하고 상상의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벨네 작품의 특징입니다.카날레토의 작품과 달리 특정 장소를 그린 것은 아니지만, 이상화된 이탈리아 교외의 풍경을 생각 나게 합니다.퐁페오·지로ー라모·바토니폼페이오 지로라모 버트니, 존 스콧, 1774바 토니는 18세기 로마에서 활동한 초상 화가입니다.오늘 우리가 기념 사진을 찍게, 그랜드 투어 중인 영국인은 그에게 초상화를 주문했습니다.그림 속의 인물은 1770년대에 로마를 여행한 영국인 존·스콧과 알려지고 있습니다.하얀 가루를 건 머리 또는 가발을 리본으로 맺고 이탈리아에 샀다고 생각하는 비단 웃옷을 입고 있습니다.고대 조각을 연상시키는 석조 대좌에는 그림을 그린년도의 “1774”이라는 숫자와 바토니의 서명을 마치 새긴 것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초상화의 주인공이 정면이 아니라 왼쪽을 바라보고 있고, 영국의 저택의 벽난로 위에 높이 걸었다면 방 전체를 위엄을 갖추고 내려다보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안토니·반·다이크안토니 반 다이크, 존 스튜어트, 버나드 스튜어트 형제, 1638년경그림 속의 소년들은 영국 귀족의 3대 레놋 쿠스 공작의 아들들이고 왼쪽이 형 존·스튜어트, 오른쪽이 동생의 버나드·스튜어트입니다.당시 18세, 17세에 불과했지만 귀족의 오만함이 느껴집니다.두 사람의 자세와 호화로운 옷은 그들의 부유함과 높은 신분이 눈에 띄게 계산된 것입니다.반·다이크는 스승 루벤스와 함께 17세기 북유럽 플랑드르를 대표하는 화가로 그 후 영국에서 찰스 1세와 왕실 가족의 초상화 그리기 등 대성공했습니다.그는 이탈리아 화가, 특히 16세기 티치아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고급 옷감의 반짝임과 감촉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인기가 많았습니다.스튜어트 형제의 삶이 그림은 스튜어트 형제가 유럽 대륙 여행에 나서는 것을 기념해서 그린 것입니다.스튜어트 형제는 1639년 1월 30일 영국 돈 100파운드와 사용인 6명을 데리고 3년간 해외 여행을 가도 좋다는 허가를 얻었습니다.그리고 3년 후 1642년에 영국에서 국왕 찰스 1세와 의회가 치열한 경쟁 전쟁(청교도 혁명)이 일어납니다.스튜어트 형제의 집은 국왕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국왕 측에서 전쟁에 참가했습니다.형과 아우는 전쟁 중 1644년과 1645년 세상을 떠났지만 이 때 두 사람의 나이는 불과 24살이었습니다.장 바티스트 그레이스장=바티스트 그레이스, 여성, 1760년경프랑스에서 유행한 로코코 시대의 패션을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문필가로 아마추어 배우이기도 했다 도·구레 온 후작 부인으로 추정됩니다.18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유행한 뽄빠 두루 후작 부인의 머리와 옷의 스타일이 눈에 띕니다.머리는 가르마ㅇ봇을 풀어 나란히 엮은 곱슬 머리가 특징인 ‘테트라도 무통(염소 머리)’스타일로 했습니다.머리에는 흰 파우더를 뿌리고 진주와 비단으로 만든 푸른 색 리본을 뺐지만 이들의 머리 장식은 그것들을 유행시킨 퐁파두르 후작 부인을 딴”팍팍(pompom)”라고 불렸습니다.넓은 사각 목선과 캇토와ー크 레이스에서 만들어진 섬세하고 화려한 소매가 눈에 띕니다.베드로 론기피에트로롱기, 기사맞이 여인, 1745-55피에트로·론기는 18세기의 베네치아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상으로 풍자를 담은 작은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하얀 가루를 건 머리 또는 가발, 화려한 레이스와 넓게 펼쳐진 옷 소매 등 유행에 맞추어 치장한 여성이 신사를 맞고 있습니다.두 하녀는 자수하는 데 집중하는 반면 여성은 자기가 할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그녀는 모범을 보여야 되지 않는 위치에 있지만 하녀들의 성실하고 정숙한 모습과 대조적인 모습입니다.이처럼 상류 계급의 비도덕적 행동을 풍자하는 그림은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했습니다.프란시스코·데·고야프란시스코 데 고야, 이사벨 드 포르셀 부인, 1805년 이전고야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판화가 카를로스 3세, 카를로스 4세, 헤루 니다ー도 7세의 궁정 화가로 일했습니다.그림 속 여인은 미국 식민지의 국무장관이었던 동·안토니오·데·폴 셀의 아내 이사벨·데·폴 셀 부인(1780년경-1842)입니다.그녀가 입은 옷은 전통적으로 낮은 계급의 여성인 마하(maja)의 복식지만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스페인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 유행하였습니다.화려한 검은 레이스 숄을 걷고, 머리에는 검은 레이스로 만든 만틸라(mantilla)을 썼어요.만틸라를 고정한 빗에는 검은 리본으로 만든 꽃이 있어요.이 작품은 내셔널 갤러리가 발간한 『 명화 100선(1994)』의 표지 작품으로 선정될 만큼 고야의 대표작으로 고안되었습니다.그녀의 아래 그, X선 사진의 비밀화가들은 이미 사용하고 있는 캔버스 위에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것도 있었습니다.”이사벨·데·포루셀 부인”도 캔버스를 사용해서 그린 그림입니다.이 캔버스에는 원래 남자의 초상화가 그려지고 있었습니다.X레이 촬영으로 분석한 결과 남자의 초상화를 그린 다음, 배니 시를 입히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아마 남자의 초상화를 완성시키지 않고 그 위에 새롭게”이사벨·데·포루셀 부인”을 그렸을까요.토마스 로렌스토마스 로렌스, 찰스 윌리엄 램튼(레드보이), 1825토마스·로렌스는 17세기 반·색, 18세기 버러와 레이놀즈의 뒤를 이어 영국을 대표하는 초상 화가로 특히 아이를 그린 그림으로 유명합니다.이 작품은 1967년에 영국의 우표에 실린 최초의 그림에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제1대 달람 백작이 자신의 아들이 67세 때 맞춤한 것입니다.소년은 1831년 13세에서 결핵으로 죽어 버린 것으로 이 그림은 그를 생각하고 소중한 작품으로 남은 것입니다.이 작품은 루소(1712-1778)이 주장하듯이, 아동기를 특별한 시기로 보기 시작했다 당시의 관점과 자연의 숭고한 힘에 대한 낭만 주의적 관심을 담고 있습니다.로렌스는 놀자유의 한 어린이가 최고의 스승인 자연의 가르침을 받는 모습을 그렸습니다.도금된 액자는 처음부터 그림과 함께 제작되었으나 로렌스가 직접 액자 제작가 조지·모 란트(1770-1846)에 주문한 것입니다.헨리·레이 우오은헨리 레이번, 로버트 퍼거슨, 로널드 퍼거슨, 1789-90년경그림의 십대의 형제는 당시 세련된 취미 활동으로 유행한 궁술을 즐기고 있습니다.두 사람은 이 그림을 그린 몇년 후의 1792년과 1801년 각각 왕실의 궁수 부대의 일원이 되었습니다.형제는 고대 조각을 연상시키는 구도로 그려졌는데,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계몽주의가 퍼지면서 고전 주의와 고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형 로버트는 밝은 빛을 받고 확실히 멋진 옆모습을 보이고 주는데 동생의 로널드는 그림자 속에서 형이 빠진 활의 사이에서 우리를 바라봅니다.헨리·레이번은 스코틀랜드에서만 활동한 초상 화가에서 이 그림은 그의 명성을 확고히 한 대표 작품입니다.세금 대신 낸 그림19세기 영국에서는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 유산 세금이 태어났습니다.처음에는 법의 허점을 이용하고 죽기 전에 재산을 물려주는 방법으로 세금을 안 냈지만 20세기 중반에 유산소 통을 재산 증여세로 바꾸고 세금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막대한 세금을 내게 된 부자는 갖고 있던 미술 작품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이들 작품이 다른 나라에 팔고 국민이 돈을 모아 그 작품을 다시 사들이기도 있었습니다.영국 정부는 문화재와 미술품이 다른 나라에 팔리는 것을 막기 때문에 문화재나 미술품 등을 세금 대신 받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이번 전시된 레이우오은, 커스터 불, 세잔, 서전트 직품도 소장자가 세금 대신 국가에 낸 작품입니다.토마스·버러토마스·버러 의사 랄프·숀 버그, 1770년경버러는 라이벌 조슈아·레이놀즈(1723-1792)과 함께 18세기 후반 영국을 대표하는 초상 화가입니다.당시 유행한 복장에 자연스러운 자세를 한 인물들을 풍부한 색감과 가벼운 붓 터치로 그렸습니다.고향의 영국 남동부 소도시에서 활동하던 그는 1759년에 휴양 도시 버스로 이주해 그의 그림은 여기에 휴양을 온 영국 상류층에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이 작품은 버스에서 자신의 가족을 진료했던 의사 랄프·숀 버그를 그린 그림입니다.그는 낭만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가루를 쓴 가발을 쓰고 지팡이를 가진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데이비드·윌키데이비드·윌키, 기도대 앞에 무릎을 꿇은 소녀, 1813영정 속의 소녀는 군인이자 정치인이던 제1대 마루 그레이브 백작의 딸 오거스타·핏프스의 12살 때의 모습으로 추정됩니다.초상화가 그려진 1813년 오거스타는 이미 돌아가고 있어서 숨진 딸을 추모하기 위해서 주문한 그림입니다.풍부한 색채감, 소녀가 입은 드레스의 붉은 벨벳과 하얀 소매, 컬러의 부드러운 붓 터치는 네덜란드의 옛 거장들의 그림을 생각 나게 합니다.스코틀랜드의 화가 윌키는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1823년 헨리·레이번의 사후에는 그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에서 왕의 초상 화가가 되었습니다.클로드 로랑클로드 로랑, 성 우르술라 출항, 1641성인들의 일생의 이야기를 담은 13세기의 책 『 황금 전설 』에 나온 우르술라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우루스라는 브리튼의 공주로 딸 11,000명과 함께 로마에 순례를 가는데, 그 후 독일의 쾰른에서 이곳을 침략한 유목 민족인 훈족의 장과 결혼하는 것을 거부하고 죽었습니다.클로드, 로란은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풍경화로 유명하고 터너를 비롯한 18-19세기 영국의 풍경 화가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18세기 영국에서는 귀족의 시골 저택의 정원을 구 로드의 그림 속 풍경을 모방해서 거두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죠.조지프, 엄마도 윌리엄·타나조지프 말라드 윌리엄 터너,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이별, 1837년 이전그리스 신화의 헤로과 레안도 손실이 이야기를 그린 그림입니다.비너스의 사제인에 나는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어 헤레스 폰트 해협의 도시 세스 토스에 살고 있었습니다.그녀는 해협 동쪽에 사는 레안도로스로 사랑을 하고 매일 밤 그녀를 보려고 바다를 헤엄치고 온 그 때문에 불을 붙였습니다.어느 날 바람에 등이 꺼져서 레안도 손실이 바다에서 죽자 헤로도 역시 죽음을 선택합니다.화면 중앙 테라스에는 날개 달리 큐피드가 불과 횃불을 가지고 있고 결혼의 신!면이 그 옆에 서고 있습니다.테라스 아래 해변의 어둠 속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지에 나와 레안도 손실이 보입니다.터너는 클로드·로란의 풍경화에서 보이는 균형 잡힌 고전적 구조, 감성적 색채, 그리고 대기의 효과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존·콘스타 부루존 컨스터블, 스트럿포드에 있는 종이 공장, 1920콘스타 부루는 자신이 날 활동한 서포크 지역의 일상의 풍경을 많이 그렸습니다.스토라트 홀드 공장은 스토라트 홀드 교외의 소스 투아 카와시마 위에 세워진 수력을 이용할 종이 공장입니다.그는 야외 스케치를 대형 캔버스에 옮기고 그렸습니다만, 때로는 스케치 후 몇년이 지나면서 유화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이 작품은 콘스타 부루가 1819-1825년에 영국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한 폭이 6피트였다는 점에서 “6피트의 그림”으로 불린 대형 풍경화 6점 중 2번째 그림입니다.자연을 깊게 관찰하고 그린 그의 작품은 자연과의 교감을 중요시한 프랑스의 바르비종 화파과 낭만 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빛에 대한 관심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습니다.살바토르·러 등살바토르 로사, 머큐리와 거짓말쟁이 나무꾼이 있는 풍경, 1663년경고대 그리스에 전해지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모은 『 이솝 우화 』에서 머큐리와 나무꾼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한국에서는 김부 은부의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이 장면은 머큐리가 돈의 도끼를 가지고 강에서 나오자 거짓말의 나무꾼이 금도끼 은도끼를 받으러 달려가는 순간을 그린 것입니다.화가는 이야기의 전달보다 빠른 붓 놀림과 풍부한 색감으로 표현한 장엄한 풍경의 표현에 더 초점을 맞췄습니다.마법을 그린 그림과 격정적인 풍경화로 알려진 17세기의 화가 로사의 그림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자연의 숭고함을 그린 낭만 주의 화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백지 수표를 제안된 그림이 그림은 로마에서 풍경화를 모은 로렌조·오노 후리오·코롱나(1637-1689)이 살바도르·로사에 그리고 달라고 요청한 그림입니다.코롱나는 클로드·로란과 부산의 그림에 이어로사의 그림도 꼭 원하고 있었습니다.코롱나는 로자의 작품을 손에 넣기 때문에 로자에 백지 수표를 보내고 그림의 가격을 직접 결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인상주의, 빛나는 순간19세기 후반 프랑스에 등장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산업 혁명으로 근대화한 도시의 달라진 모습에 관심을 가졌습니다.사진이 등장하면서 화가는 대상을 그대로 묘사할 필요가 없어지고 튜브 물감의 발명으로 야외 작업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인상주의자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빛과 색채를 그리려고 했습니다.화가는 “그림으로 중요한 것은 주제인 회화는 자연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다”라는 전제에서 벗어나고 스스로 선택한 현실 속의 순간을 주관적으로 표현했습니다.인간과 자연으로 향하던 화가의 시선은 점차 눈에 보이는 객관적 세계를 넘어 화가의 내면에 향하게 됩니다.풀 석 그루풀 세 그루, 작업실 난로, 1865년경세잔의 초기작에서 스튜디오의 물물을 대충 그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정중하게 배치했습니다.난로 뒤에 캔버스를 두고 검은 난로가 두드러지면서 난로의 검은 연통은 그림의 화면을 좌우로 나눕니다.화면 왼쪽의 난로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화면 오른쪽 테이블이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렸습니다.전체의 색채가 어두운 것은 세잔 초기 그림의 특징입니다.세잔은 후기 작품에서 사물의 모양과 색을 단순화하고 질서 있는 구조를 만들고 19세기 말의 인상주의와 20세기 초의 입체주의를 잇는 가교 역할한 화가로 평가됩니다.두 친구, 폴·세장과 에밀·졸라의 이별세잔의 “작업실의 날”을 처음 가졌던 사람은 소설가 에밀·졸라입니다.세잔과 졸라는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지내던 친구들입니다.졸라가 먼저 프랑스 파리에서 작가로서 성공한 뒤 세잔을 파리에 오게 했습니다.그러나 1886년 졸라가 쓴 소설 때문에 두 사람의 우정은 끝납니다.졸라는 화가가 주인공의 소설 『 작품 』을 썼는데, 주인공의 상황이 세잔과 비슷합니다.<작품>의 주인공은 새로운 화풍으로 그림을 그립니다만, 사람들에게 인정되지 않고 결국 자살하게 됩니다.소설을 읽고 상처 받은 세장는 고향에 돌아갑니다.그 후 세잔은 약 20연간 고향의 유명한 상트·우이크토와ー루 산을 그렸습니다.장·밥티스트 가미유 죽이겠다장 =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기울어진 나무, 1860-65 년경콜러는 호수와 진 자작 나무가 있는 이와 비슷한 풍경을 몇개 그렸습니다.오렌지 색의 필치로 표현한 여성 모자에 보듯 인물을 아주 여러 차례의 필치로 간략히 그렸습니다.화면은 아주 작은 붓의 터치로 가득 반짝이는 같은 효과를 줍니다만, 가까이서 보니 모양이 뿌옇게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콜러는 야외 풍경을 직접 스케치하고 이에 기초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그의 풍경화는 19세기 후반 풍경 화가 특히 인상주의자가 빛을 표현하는 방법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존·가수·사전트존 싱어 서전트, 와인잔, 1875년경서전트가 불과 19세 때에 그린 그림입니다.캔버스에는 1874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아마 서전트가 브르타뉴의 상태의 나방에서 여름을 보낸 1875년에 그린 작품이죠.서전트의 부모는 미국인이지만, 그는 피렌체에서 태어났고 인생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습니다.그는 다양한 재질 위에 떨어지는 빛의 효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햇빛이 바닥을 부분적으로 비추는 모습과 식탁보를 주변의 빛과 색이 반사되어 바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모습 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빛의 효과에 대한 관심과 물감을 많이 달고 캔버스에 바로 바르는 유려한 붓 놀림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피에르·오규 스토·르누아르피에르·오규 스토·르누아르, 목욕자, 캔버스에 유화, 1885-90년경고대 그리스 신화의 디아나나 액테옹, 성경의 수잔나와 장로들 등 누군가가 지켜보는 것을 모르는 누드의 여성을 그리는 건 과거부터 내려온 테마입니다만, 르누아르는 이 시대의 평범한 여성 누드를 그림의 주제로 했다는 점이 특별합니다.르느와르는 1881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본 고대 로마의 조각 상과 르네상스 회화에서 영감을 얻고 고전적 전통에 따르는 누드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짧은 붓 터치와 보색으로 대상의 빛과 움직임을 표현하고 붓으로 확산된 듯한 느낌을 표현하고 그림 속의 여성과 그 주변의 풍경을 더 감각적으로 보입니다.에도우아ー루·매니저에두아르 마네, 카페 콘셸 한쪽, 캔버스에 유화, 1878-80년경대상을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이 좋은 짓은 근대적 삶의 모습을 주제로 선택, 물감을 자유롭게 사용했다.이런 면에서 오늘의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지고 있지만 정작 머니 자신은 인상주의 전시회에는 참가하지 않고 평생 살롱전에서 인정 받기를 원했습니다.마네는 잔을 몇개나 가지고 있으면서 맥주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서빙 하는 종업원의 솜씨에 감탄하고 그 중 가장 뛰어난 종업원을 작업실에 와서 모델이 되어 달라고 제안했대요.그녀는 자신의 “보호자”도 함께 가서 돈을 받는 조건으로 흉내의 제안을 수락했지만 그림 속의 푸른 셔츠를 입고 담배를 피우는 남자가 그녀의 보호자입니다.폴 고갱폴 고갱, 창문 앞 과일 그릇과 맥주잔, 캔버스에 유화, 1890년경후기 인상주의 화가 고갱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색의 순간을 포착 인상주의를 넘어 더 영속성 있는 접근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세잔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1880년경, 고갱은 3잔의 그림 6점을 구입했지만, 그 중에서도 “과일 접시, 컵, 사과가 있는 정물(1879-80년)”가 가장 좋았습니다전시된 고갱의 작품은 고갱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최고의 보석”이라고까지 표현한 세잔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로 볼 수 있습니다.이 작품에서도 과일, 비스듬하게 놓인 칼, 구겨진 식탁보 등 3잔의 정물화 속의 소재가 많이 나타납니다.이 시기에 손님이 사용한 사인 PGo. 가 하단에 거꾸로 쓰고 있습니다.빈센트 반 고흐빈센트 반 고흐, 풀숲 나비, 캔버스 유화, 1890반 고흐는 오늘 인기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지만 살아 있었을 때는 그림을 거의 못 팔아 스스로 실패자라고 생각했다.이 작품은 고흐가 정신병이 악화되면서 남부 프랑스 산=레미촌 인근의 정신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 그린 그림입니다.그는 죽기 얼마 전의 1890년 5월 4일경 동생 테오에 “그림이 잘 그려진다.새로운 자른 잔디의 모습을 2작품도 그린”과 편지를 썼습니다.이 그림이 여기서 말했다2개의 작품 중의1)추정됩니다.반 고흐는 잔디와 잡초 위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가까이서 거두었습니다.그의 작품은 감정을 담은 표현적인 밝은 색채와 유화 물감을 거듭 두툼하게 바르다 잉파스토 기법이 특징입니다.팬·고흐와 고갱네덜란드에 살던 고흐는 프랑스 파리에 온 1886년 고갱을 만났습니다.반·고흐가 1888년에 남부 프랑스의 아를르에 옮긴 뒤 두 사람은 2개월을 함께 보냈는데 반·고흐가 논쟁 중에 자신의 귀로를 끊다 사건이 일어나자 고갱은 아를르를 떠납니다.반 고흐는 아를에서 해바라기 연작 등 대표 작품을 그렸습니다만, 정신병이 악화된 1889년에 병원에 입원하고 이듬해 37세로 자살하고 버립니다.이번 전시하는 고흐와 고갱의 작품은 모두 1890년에 그려졌습니다.반 고흐는 이 나이에 샌=레미 근처의 정신 병원의 버려진 정원을 그리며 곧 돌아가셨습니다.고갱은 브르타뉴에서 세잔에 대한 존경을 담고 이 그림을 그린 뒤 타히티로 떠났어요.클로드·모네클로드 모네, 붓꽃, 캔버스에 유화, 1914~17년경모네는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풍경 화가입니다.이 작품은 모네가 1914년대부터 1917년 사이에 그린 무늬 연작 20점의 하나로 맞춤 못니에 있는 그의 정원을 그린 것입니다.붓꽃은 모네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었습니다.붓꽃 연작은 거의 높이 2미터의 대형 작품에서 매우 독특하고 새로운 관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모네는 두껍고 대담한 필치로 보라 색, 청색, 녹색 물감을 바르고 캔버스의 흰 바탕이 나타난 채 내버려두기도 했습니다.이는 당시 모네가 백내장으로 시력이 완전하지 않은 영향도 있겠지요.이 작품을 완성시켰는지 아니면 미완성 상태로 두었는지 모르겠어요.겠다는 것이었고, 오늘의 전시회 영국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해”의 작품 소개와 해설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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